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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 7/27 판단과 비판을 넘어
 
이름 : 최인환 2008-07-26 19:42:48, 조회 : 2,040, 추천 : 512

성경말씀 : 누가복음 15장 11-32절
설교제목 : 판단과 비판을 넘어

판단과 비판을 넘어
누가복음 15장 11~32절


  한 주 동안 평안하셨습니까? 아시는바와 같이 저와 조진희 전도사는 200여명의 외국인 근로자와 이주여성 가족,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여름 캠프로 대천 해수욕장에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매일 같이 좋던 날씨 가운데 행사가 있기 전 몇 일 전부터 뉴스에서는 당일에 태풍 갈매기의 영향으로 인해 비바람이 예상된다며 야외 활동을 자제할 것을 당부했습니다. 그래서 행사를 준비하면서 저희는 참으로 많은 걱정을 했습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여름 캠프는 일년 중 가장 큰 규모의 행사로 외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행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행사 당일 태풍의 영향을 받는다면 행사를 망칠게 불보듯 뻔했기에 미리 취소를 할까 생각도 해봤지만 저희의 걱정은 기우에 그쳤습니다. 행사 당일 해가 난 것입니다. 사실 외국인 노동자들과 이주여성들은 날씨에 상당히 민감합니다. 여러 번 행사를 해 본 결과 행사 당일 아침 비가 오면 참석률이 현저하게 떨어진다는 것을 경험 했기에 만약 지난 주일 아침 비가 왔다면 예약한 버스 중 절반은 취소를 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행사 당일 아침에 해가 뜨면서 예상 인원에 근접한 사람들이 참석했습니다.

  하지만 버스를 타고 보령으로 가면서 비가 시작되기 시작했고 빗줄기가 점점 더 굵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다들 바다에 들어갈 수 있을지 걱정하기 시작했고 제 마음은 타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마음속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힘들게 일하는 노동자들과 이주여성 가족들입니다. 이들이 일 년에 한번 어렵게 오는 바다인데 잠깐만이라도 바다에 들어갈 수 있는 날씨를 허락해 주세요.“ 물론 이러한 기도는 저만 한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실무자로 참석한 전도사님들 그리고 누구보다 살림교회 성도님들이 함께 기도해 주셨을 것입니다. 이러한 갈급한 저희들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정말 신기하게도 날씨를 주관해 주셨습니다. 보령에 도착해 시내에서 식사를 하고 대천 해수욕장으로 이동하게 되었는데 식사를 마치자 점점 빗줄기가 얇아지더니 해수욕장으로 이동하자 비가 그쳐버린 것이었습니다. 그 때 비로소 저희는 안도했고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계시구나라는 것을 확신 할 수 있었습니다. 머드 축제장 및 해수욕장으로 이동해 짐을 풀고 해수욕 및 머드 축제를 즐기기 시작했습니다. 구름이 햇빛을 가려주어 다들 피부가 탈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다들 얼마나 좋아하고 행복해하던지... 사실 저희들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해수욕장에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외국인 노동자들이나 이주여성들은 그러한 시간을 내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설령 아무리 시간이 있다 해도 여러 가지 제약으로 오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기회가 아니면 바다를 올 수 없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좋아합니다.

  어떤 노동자가 머드를 가지고 장난을 치면서 저한테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형님! 저 정말 행복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행사 준비로 인해 몸과 마음의 피로가 싹 사라지고 이들과 기쁨을 나눌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그렇게 즐거운 시간을 3시간 남짓 보내고 이제 돌아갈 시간이 되어 짐을 꾸리고 있는데 갑자기 파도가 세지면서 방송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풍랑주의보가 발효되었으니 모두 바다 밖으로 나와 달라는 방송이었습니다. 저는 그 방송을 듣는 순간 정말 신가하다. 신기하다. 라는 말을 되뇌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정말 감사했습니다.
  
  그렇게 무사히 행사를 마치고 대전에 돌아오는데 행사에 처음 참석한 한 여성 자원봉사자가 저한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부장님! 저는 원래 외국인 노동자에 대해 굉장히 안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평소 길거리를 지나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보이면 그 들 멀찌감치 피해 다니곤 했었는데 이렇게 직접 만나서 대화하고 시간을 보내다보니 제 생각이.. 제 판단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되었어요. 어떻게보면 한국 사람들보다 훨씬 착한 것 같아요.’
  
  저는 이 말을 듣는 순간 외노센터에 와서 사역을 시작하기 전의 저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저도 이 사역을 하기 전에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그들을 판단해 버렸던 것이었습니다.
  
  사실 우리들에게는 섣부르게 남을 판단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때 그 때 기분에 따라 남을 판단하는 경우도 있고 나에게 조금이라도 손해를 끼치는 사람이 있으면 그를 정죄하고 좋지 못한 사람으로 판단해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남을 판단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고 있을까요?
  오늘 우리가 본 본문은 ‘탕자의 비유’라는 제목으로 너무나 잘 알려져 있는 말씀입니다. 아버지를 졸라 유산을 당겨 받은 작은 아들이 그 많은 재산을 전부 탕진하고 후회하면서 아버지에게 돌아와 자신을 품군의 하나로라도 받아달라고 빌며 이에 대해 아버지는 잃었던 아들을 다시 얻었다며 기쁨으로 잔치를 벌이는 장면입니다. 이 말씀을 우리의 삶에 적용하면 하나님을 등지고 방황하던 우리들을 조건 없이 받아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느낄 수 있게 하는 너무나 유명한 장면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 작은 아들을 자신의 모습으로 생각하며 하나님을 등지고 있는 자신의 삶을 돌이켜 하나님에게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그런데 오늘 전하는 말씀의 초점은 큰 아들에게 맞춰져 있습니다. 어떻게보면 저는 평소 우리들의 삶의 모습에서 작은 아들보다 이 큰아들의 모습이 나타날 때가 더 많다고 생각합니다. 큰 아들은 자신의 의를 내세워 동생을 판단하고 정죄했습니다.
  아버지의 재산의 절반을 가지고 가 전부 탕진하고 돌아온 동생이 곱게 보일 리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였던지 큰 형은 30절의 말씀에서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라고 원망에 찬 마음을 여과 없이 발설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동생을 표현 할 때 이 아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이 아들이라는 단어는 원문을 보면 당신의 아들! 즉 아버지의 아들!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동생을 ’내 동생‘이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이 자식이‘라는 말을 통해 동생의 과오를 정죄하며 그를 동생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서슴없이 들어내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동생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도리어 판단하고 정죄했습니다. 여러분은 이 큰아들의 행동에 대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사실 큰아들의 모습은 이미 신앙을 가지고 있지만 주님의 긍휼을 누리지 못하는 성도들의 모습을 비유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곳곳에서 판단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사실 대부분의 판단은 긍정적으로 나타나기보다는 부정적으로 나타날 때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판단을 비판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비판하지 말 것을 종용하고 있을까요? 그 이유는 판단(비판)이 ‘자기 의’라는 죄와 깊이 맞물려 있기 때문입니다.
  남을 판단(비판)하지 말아야 할 첫 번째 이유는 마태복음 7장 2절 말씀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즉 남을 판단(비판)하는 사람이 그 판단(비판)을 받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일단 판단을 해버리면 판단하는 그 사람의 영이 묶여버리고 맙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이 싫어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간에 그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그 것들을 풀어버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그 것을 묶고 있는 한 여러분들도 묶여 버리고 말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8:18)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부터 남을 판단하게 되었을까요? 그 근원은 창세기에 등장하는 선악과 사건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판단의 기준이 하나님이 아닌 자신이 되고자 하는 욕구의 중심에 바로 선악과가 있었습니다. 선악과가 무엇입니까? 왜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 먹게 되었습니까? 물론 뱀의 꼬임이 있었지만 그 근원에는 자신이 주체가 되어 선과 악을 판단하고자 하는 욕망이 내제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선악과를 따먹고자 했던 그 마음의 근저에는 하나님의 눈으로, 하나님의 마음으로 나와 내 주변을 보기보다는 나 자신의 의를 기준으로 판단하겠다는 의지가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긍휼어린 눈으로 내 이웃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내 기준으로 재단하는 것! 이것이 판단인 것입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를 보면 프로크로테스라는 인물이 나옵니다. 이 존재는 걸핏하면 지나가는 사람들을 잡아다가 자신이 살고 있는 소굴로 끌고 갑니다. 이 소굴에는 자신의 신체 사이즈와 정확하게 일치하는 철 침대가 놓여 있는데 그는 잡아온 사람을 그 침대에 눕힌 후 그 사람이 침대보다 작으면 늘려서 죽이고 크면 잘라서 죽여버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현재도 “프로크로테스 침대‘라고 하면 자신의 생각에 따라 사람들을 판단하고 재단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혹시 우리에게는 이러한 프로크로테스 침대의 모습이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판단하지 말라고 하신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것은 판단하는 사람의 영혼을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처음에는 판단의 대상이 다른 사람이지만 종국에는 그 판단의 기준으로 우리 자신을 판단하게 됩니다. 즉 우리가 스스로 자신을 다시 판단하게 됨으로써 나는 왜 이것 밖에 되지 못할까?등의 자책감 속에 괴로워하게 되어 버린 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비판의 문제는 하나님을 막 알고 믿기 시작한 초신자보다는 이미 신앙생활을 오래 해온 성도들에게 심각하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남을 판단하지 말아야 할 두 번째 이유는 판단의 이유가 자신에게 동일한 문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증언합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예수님은 우리가 누군가를 판단하기에 앞서서 내 안에 있는 들보부터 제거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그 들보야말로 우리가 누군가를 판단하게 하는 원인을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다른 사람의 어떠한 문제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한다면 그 현상 이면에 우리 안에 동일한 문제가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C.S루이스가 말한 것처럼 교만한 사람이 교만한 사람을 가장 잘 알아보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정의감에 불타있는 ‘義(의)의 화신’들이 있습니다. 처음에 그들의 모습을 보면 상당히 멋있어 보입니다. 그들의 하는 말들이 상당히 논리적으로 보이며 그들의 정의가 매력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극단적인 비판의식에 투절한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영혼의 메마름과 내적 분노 그리고 관계의 단절이라는 문제가 도사리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판단을 통해 남들에게 상처를 주고 또한 그 상처를 받은 사람에게 우리는 상처를 받게 될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에게 상처를 준 사람이 죄를 지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 상처를 가진 상처받은 우리가 죄를 짓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어떤 부분이 상처로 남는 이유는 자신의 자아 가운데 특별히 취약한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에 대한 연민과 집착 그리고 자기의가 어우러져 내게 상처를 준 사람을 마음속에서 놓지 못하고 미워하고 정죄하게 됩니다.
  흔히 우리는 우리의 의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사람들과 거리를 두며 궁극에는 관계가 깨어진 것을 경험해봤습니다. 따라서 상처받은 일로 힘들어 하며 상처를 준 사람을 미워하는데 머물러있다면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 할 수 없습니다. 상처받게 된 자신 자아의 문제, 자기 연민과 자기의의 문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자아를 묶고 있는 그 질긴 끈이 끊어 질 수 있게 해달라고 주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그러기 전까지 우리는 여전히 아버지의 마음을 잃어버린 큰아들로 남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판단하는 한 우리는 아버지의 마을을 잃게 되고 그리하여 큰 아들의 모습으로 남게 됩니다.    
  다른 이를 판단하지 말아야할 세 번째 이유는 판단과 비판으로는 그 사람이 변화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의 영혼이 변화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 판단과 비판을 통해 내가 해를 입을 수 있으니 그 비판을 삼가라는 것입니다.
  한 예로 부모님이 자식에게 “너는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매일 컴퓨터 게임만하고 있니? 도대체 내가 너에게 안 해 준 것이 뭐가 있니? 학원도 보내주고 문제집도 사주고 맛있는 간식도 매일 재주지 않니?”라고 말했다면 이러한 비판은 사실 자식의 실상을 예리하게 지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말을 듣는다고 쉽게 감사하는 마음이 들지 않는게 실상입니다. 물론 그러한 비판을 받아들여 변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경험해 보셔서 아시겠지만 쉽지 않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비판과 비난을 통해 그 사람을 변화시킨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내게 어려운 것은 다른 사람에게도 똑같이 어렵습니다.
  대학교를 다닐 때 한 교수님으로부터 이러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교수님이 미국에서 목회를 하고 계실 때 있었던 일이라고 하셨는데 한 여고생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학생은 이민을 간 한국 가족의 자녀였는데  학교에 적응을 하지 못해 하루가 멀다하고 학교에 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학교를 간다고해서 학업에 충실 한 것도 아니었고요. 그러던 어느 날 보다 못한 어머니가 자녀에게 막 뭐라고 했다고 합니다. ‘부모님은 이민와서 이렇게 힘들게 일해서 네 학비를 버는데 어떻게 자식이라는 것이 부모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그렇게 자기 멋대로만 하는거니?’ 등등 홧김에 자신의 자녀를 비난하는 말을 막 쏟아냈던 것입니다. 그러자 그 학생은 가만있지 않고 어머니에게 막 대들었다고 합니다. 딸이 수긍하지 않고 대들자 더욱 화가 난 어머니가 그 학생을 때렸습니다. 그런데 그게 문제가 된 것입니다. 사실 한국에서는 부모가 자식을 체벌하는 것이 별 문제가 되지 않지만 미국 사회는 아무리 부모 자식간이라고 해도 폭력이 행사되면 법적으로 문제가 된다는 것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때 마침 그 장면을 목격한 옆집 주민이 경찰에 신고해 이 어머니가 경찰서에 끌려 간 것입니다. 상황이 그렇게 되자 집안과 근처에 사는 한국 교민들이 발칵 뒤집히게 된 것입니다. 당시 이 어머니를 경찰서에서 풀려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딸이 경찰서에 가서 자신의 잘못으로 벌어진 일이니 어머니를 용서한다는 문서에 싸인을 하는 길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집안의 아버지부터 시작해서 친척들 이웃 교민들이 그 학생에게 찾아가 제발 좀 경찰서에 가서 싸인 좀 하라고 닦달을 했다고 합니다. 때로는 윽박을 지르며 어떻게 자식이 부모를 경찰서에 있게 만드냐며... 자식된 도리로 그러면 안된다며 당장 가서 싸인을 하러 가라고도 하며 근원적인 잘못이 너한테 있으니 당연히 네가 경찰서에 가서 싸인을 하고 어머니를 나오게 해야 한다는 등등.. 그러나 이 학생은 요지부동이었다고 합니다. 오히려 주변에서 그러면 그럴수록 자신은 절대 그럴 수 없다며 어머니가 잘못을 했으면 잘못에 대한 댓가를 치러야 한다고 말을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이제 하루만 더 지나면 한국으로 따지면 검찰로 송환되어 재판을 받을 때까지 나올 수 없을 상황에까지 이르렀다고 합니다. 상황이 너무 다급해지자 교민들이 목사님께 찾아와 도움을 요청했다고 합니다. 사건에 대한 모든 과정의 이야기를 들은 목사님도 사실 자신이 없었지만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고 그 학생을 찾아갔다고 합니다. 그 학생의 집에 가자 학생은 방문을 걸어 잠그고 아무도 만나지 않겠다고 버티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단 5분만이도 좋으니 잠시만 시간을 내어 달라고 하여 어렵게 방문을 열게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마주 앉은 후 잠시 기도한 후 그 학생의 손을 잡으며 이렇게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그 동안 얼마나 힘들었니? 사실 이 상황에서 가장 힘든 사람은 바로 너일 거라는 것 목사님은 너무 잘 안단다.’ 그러자 놀랍게도 독기를 잔뜩 품고 있던 이 학생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며 울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잠시 시간이 지난 후 학생이 말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목사님! 사실 저 너무 힘들었어요! 그런데 사람들은 찾아와서 다들 어머니 걱정만 하고 저를 나쁜 아이 취급하며 비판과 비난만 일삼았어요! 그래서 더욱 경찰서에 가기 싫었어요. 그런데 목사님이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그 동안의 마음 고생한 것이 모두 사라지는 것 같아요. 사실 자기 부모님을 경찰서에서 고생하게 만들고 싶은 자식이 어딨겠어요! 저도 제가 잘못한 것을 알고 있었지만 주변 사람들이 저의 어려움은 생각안하고 잘못된 것만 지적하니 오기가 생겨서 그랬던 거예요. 얼른 경찰서에 가야겠어요. 목사님이 함께 가주시겠어요?’ 그렇게 한 후 목사님과 함께 경찰서에 가 어머니와 함께 집에 돌아온 그 학생의 삶에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하루가 멀다하고 나가지 않던 학교에 하루도 빠지지 않고 출석하고 공부도 열심히 하며 교회 생활도 착실히 하며 부모님과의 관계도 눈에 띄게 좋아졌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비난과 비판으로는 사람이 변화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한 영혼을 변화시키는 것은 관용과 희생 사랑입니다.
  나와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고, 삶의 방식도 다른 사람을 인정하고 용납한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나의 견해를 반박하면 화부터 나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지금도 종종 텔레비전 토론 프로그램에 나온 사람들의 토론을 보면 한국 사람들의 대화는 ‘주장은 있지만 토론은 없다’라는 말을 실감하게 됩니다. ‘나는 파리의 택시 운전사’라는 책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있는 홍세화씨는 프랑스 사회를 ‘톨레랑스가 있는 사회’라고 표현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톨레랑스’란 나와 다름을 용납하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나와 다름을 틀림으로 이해하는 나와 다름을 나를 적대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마음을 내려놓아야 할 것입니다. 다름의 다양성을 가지고 타인과 협력하여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가기 위해서도 관용은 꼭 필요한 것입니다.
  또한 한 사람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자기 권리에 대한 자발적인 포기와 희생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사실 어떤 사람을 존경하고 사랑한다면 문제가 다릅니다만, 나의 일에 사사건건 반대하고 딴죽을 거는 사람을 용납하고 그를 위해 내 권리를 포기하고 희생한다는 것은 보통 힘겨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을 위해서도 그렇게 하라고 부름받았습니다.  
  저는 사랑이란 '남을 위해 좋은 몫을 남겨두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런 것은 아예 불가능하다고 지레 겁먹고 시도조차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삶을, 우리의 영혼을 변화시키실 수 있는 이유는 명확합니다.
  예수님의 삶은 다른 이를 기쁘게 하려는 동기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주님은 당신께 나아오는 사람들의 약한 것을 다 고쳐주셨습니다. 소외감 속에 살고 있던 사람들의 벗이 되어 주셨고, 기꺼이 그들의 손님이 되어 주셨습니다. 또 우리를 대속하기 위해 당신의 생명까지 바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을 대신 짊어지셨습니다(사53:11). 만약 예수님이 자신께 나아오는 사람들을 정죄하고 판단하고 비판했더라면 그들의 영혼이 변화 될 수 있었을까요? 예수님은 당신께 나아오는 사람들을 바다가 세상의 모든 물을 차별 없이 받아들이듯 포용하셨습니다.  
  예수님을 가리켜 "상처입은 치유자"(The Wounded Healer)라고 한 사람이 있습니다. 다른 이들의 아픔과 상처를 보듬어안고 치유해주기 위해 자기의 상처와 아픔을 돌볼 겨를이 없었던 거지요. 우리가 온전히 주님을 닮지는 못한다 해도 아주 조금이라도 닮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신앙 안에서 믿음 안에서 서로 협력하며 사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나와 다른 이들과의 만남을 통해 영적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다른 것은 위험한 것이 아니라 나의 삶의 지평을 넓혀줄 기회입니다. 다른 사람을 비판하거나 비난하기에 앞서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며 그들의 장점과 다양성을 통해 우리의 영성을 고양시켜 나가는데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 곁에 있는 이들은 우리에게 사랑하며 살아가기를 가르치는 스승들입니다. 우리가 곁에 있는 이들을 판단하고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러하시는 것처럼 그들이 누구이던간에 나에게 어떻게 행동하던 간에 사랑하기 시작할 때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실 것이고, 우리는 하나님 안에 있는 기쁨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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