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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 5/30 회심(回心) - 웨슬리회심272주년기념주일
 
이름 : 김준구 2010-05-29 17:15:55, 조회 : 3,194, 추천 : 493

제 목 : 회심(回心) - 웨슬리회심272주년기념주일
본 문 : 로마서 3장 19-31절

우리나라의 옛말 중에 ‘사람은 죽을 때가 돼야 변한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결국 사람이 그 만큼 변하기 힘들다는 의미이다.
어떤 목사님은 교회 안에서 가장 큰 기적은 바로 사람이 변하여 예전의 삶과 전혀 다른 삶을 사는 것이라고 했다. 그 만큼 사람이 변하는 것, 성서적으로 비유하여 회심(回心)한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것이다.

존 웨슬리라는 한 사람의 개인적인 회심(回心)의 체험을 272년이 지난 오늘, 그것도 존 웨슬리가 살았던 시공간과 엄청난 차이가 있는 이곳에서 왜 기념하는 것일까?
바로 존 웨슬리라는 한 개인의 내적변화가 그의 시대를 변화시키고, 역사를 변화시킨 “나비효과”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 사건이 오늘 우리가 이곳에서 예배하는 기적을 낳았기 때문이다.

존 웨슬리는 가난한 목사의 19명의 자녀 중 15번째로 태어났다. 그리고 자녀교육에 있어 전 세계적으로 손의 꼽힐 정도의 엄한 어머니 수산나 웨슬리에 의해 키워졌다. 존 웨슬리의 성장과정이나 젊은 시절의 이야기를 보면 전형적인 “모범생(범생이)”의 전형이다. 모범생들에게 가장 위험한 것이 무엇일까? 바로 “형식주의”가 아닐까! 바리새인들은 대단한 모범생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을 무너트린 것은 바로 “형식만 남은 신앙”이었던 것이다.

존 웨슬리는 그 유명한 옥스퍼드 대학 출신이다. 영국사회에서는 지금까지도 옥스퍼드 출신들이 사회의 리더가 된다. 그는 대단한 모범생으로 히브리어, 아랍어, 라틴어, 논리학, 윤리학, 철학, 물리학, 웅변학, 시가 신학 등 그의 연구 방면은 상당한 범위에 걸쳐 있었다. 또한 그는 그 당시 웅변가로서도 상당한 명성을 떨쳤다.

20대 초반의 존 웨슬리는 토마스 아켐피스(Tomas a Kempis,1380∼1471)의 "그리스도를 본받아"와 테일러(Jeremy Taylar,1613∼1677)의 "거룩한 삶과 죽음"이라는 책과 로우(William Low,1686∼1761)의 "중대한 부름"이라는 책과 "그리스도인의 완전론"이란 명저를 읽고 큰 감명을 받았고 성직자가 되기를 결심하여 안수를 받고 목회자가 됐다. 하지만 그의 가슴속에는 아직도 신의 불꽃이 희미하였으며 영적 경험을 사모하는 마음이 적었다.

역시 늘 장학생이고 모범생이던 존 웨슬리답게 젊은 나이에 모교인 옥스퍼드대학에 조교수(Fellow)로 부름을 받았다. 정말 잘 나가던 모범생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신앙에 대한 열심은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얼마나 열심인지 그의 동생인 찰스 웨슬리가 그의 친구들과 함께 옥스퍼드대학 안에서 신성 클럽(Holy Club)이란 모임을 만들었고 존 웨슬리를 리더로 초청했다. 역시 모범생 집안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 이 찰스 웨슬리 역시 감리회의 출발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

존 웨슬리는 처음부터 재능과 재질과 그의 영성을 인정받아 이 단체(Holy Club)의 회장으로 취임되었다. 신성 클럽은 요즘으로 치면 일종의 대학생선교단체이다. 이 단체의 나비효과가 결국 오늘날에 활동하는 C.C.C.나 IVF, 예수전도단과 같은 대학생선교단체를 만들어낸 것이다. 또한 감리교라는 교단의 조직화와 1900년대 미국의 영적대각성운동에도 영향을 준 뿌리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의 최초의 사업은 성경 연구였다. 이들은 일명 "Methodist(규칙쟁이)"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리만큼 신앙의 경건함을 중시하였다. 이들을 비꼬아 부르기 위해 생긴 별명이 결국 “감리교(Methodist Church)”라는 이름이 되었다. 이들의 모임은 보통 다음과 같은 일을 했다. 첫째 희랍어 고전문학을 연구했고 성경 공부를 한 뒤 간단한 저녁 식사로 모임을 마치곤 했다. 이들의 첫 열매는 "구휼운동"이었다. 옥중의 사람들에게, 부채자들에게, 병자들에, 그밖에 여러 가지 봉사 사업에 노력하였다.

이런 모범적인 청년기를 보낸 존 웨슬리는 모두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멋있는 선택을 하는데, 바로 당시엔 개척초기였던 미국 조지아 선교사가 되는 것이다. 역시 모범생다운 모습이었다. 허나, 신대륙을 발견하기 위해 떠난 항해가 모진 폭풍우를 겪고 난 뒤에 쓰라린 상처를 얻고서야 신대륙을 발견하듯, 또 다시 새로운 어려움을 겪어나가며 새로운 땅의 주인이 되는 영광을 얻는 것처럼 존 웨슬리의 진짜 인생도 이때부터 험난해 지기 시작한다.

드라마처럼 인생의 풍파는 성공적인 선교활동의 꿈을 안고 배를 탄 순간부터 몰아닥친다. 늘 인생은 왜 이 모양인지... 그가 탄 배 ‘시몬즈’호는 여지없이 태풍을 만나고 그는 그야말로 “죽음”의 공포에 휩싸인다. 오히려 나쁜 짓하고 도망치던 요나하고는 정반대의 상태인 것이다.

이 와중에 감사와 평안의 찬양 소리를 들으니 바로 “모라비안교도”들의 찬송이었다. 나이와 성별을 불문하고 이 사람들은 이 공포와 죽음의 순간에 평안한 모습으로 찬양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영화 타이타닉에서 마지막순간 선상에서 바이올린 연주를 하던 한 남자의 멋있는 모습이 생각나게 하는 장면이 존 웨슬리의 눈 앞에서 펼쳐지는 것이다.

“충격!” 존 웨슬리에게 이 순간은 이 말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것이라고 고백한다.
이 경험이 웨슬리의 신앙을 뿌리 채 흔들어놓은 첫 번째 계기가 되었다. 배가 도착하자 존 웨슬리는 자신의 신앙이 무언가 잘못돼 있음을 깨달아 모라비아교 목사 스팽겐베르크에게 상담을 요청했다.
“웨슬리 선생, 성령께서 친히 당신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하고 계십니까?”
이 물음에 웨슬리는 무슨 말로 대답할지 몰라 주저하였다.
이때 스팽겐베르크 목사는 다시 질문했다.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있습니까?”
이 질문은 웨슬리가 많이 들어 본 것이었다. 웨슬리는 대답했다.
“네. 그는 세상의 구주이십니다.”
“그것이 사실입니다. 그럼 당신은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구원하셨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라고 말했다. 그러나 스팽겐베르크 목사의
“당신은 자신을 잘 알고 있습니까?”
라고 되묻는 말에 웨슬리는
“나는 ...알죠”
라며 입속에서 겨우 웅얼웅얼 했을 뿐이었다. 지금까지 그는 자신의 영적생활의 실태를 이렇듯이 심각하게 검색하는 질문을 받아보지 못했다. 이 문답이야말로 그의 항해 중 얻은 최대의 수확이었다. 스팽겐베르크 목사와 대화하면서 웨슬리의 마음속에는 섬광이 번쩍였다. 그러나 이 섬광은 극히 순간적이었고 그의 마음속에는 다시 어둠 속이었다.

“존 웨슬리의 회심”이란 제목의 드라마는 이때부터 ‘위기’에 들어가기 시작한다.
“절망, 고난, 역경, 실패”이런 말들이 잘 어울리는 시기가 바로 존 웨슬리의 미국 조지아 선교기간이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잘 되어가는 것만 같았다. 존 웨슬리는 정말 헌신적으로 일했다. 새벽부터 밤늦은 시간까지, 주일부터 다음 주일까지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일했다. 하지만, 그의 사역에 대한 평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는 극단의 교회주의와 금욕주의만을 강조한 까닭에 그 피나는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 버렸다. 예를 들면 그는 영국교회에서 세례 받지 않은 사람에게는 성찬을 허락지 않았으며다. 또 영국교회에서 세례를 받지 않은 자에게는 장례식 예배를 거절했다. 또 세례는 반드시 침례로 해야 할 것을 주장했다. 그의 이러한 엄격한 태도 때문에 그는 일반신도들의 호감을 잃었다.

게다가 연애스캔들까지 겹치면서 그는 정말 끝장이 나고 말았다. 그는 식민지장관의 딸 소피아라는 미모의 여인과 서로 사랑했다. 그러나 그는 사정이 생겨 그 여자와의 결혼을 단념했다. 어느 날 웨슬리가 성만찬을 집례하는데 다른 남자와 결혼한 소피아가 예고도 없이 나타나자 웨슬리가 이 부부를 내쫓았다. 이에 분개한 그녀의 남편은 여러 가지 구실을 만들어 웨슬리를 고소하였다. 그러나 동기가 웨슬리를 비방코자하는 의도인 것이 알려줘 기각되었다. 비록 아무 근거 없는 고소사건이었으나 이 일 때문에 신도들의 불만이 노골적으로 표시돼 웨슬리는 미국 조지아선교를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존 웨슬리는 인생 최대의 고비를 겪게 되었다. 그는 심신이 망가진 상태로 영국으로의 귀환길에 오를 수 밖에 없었다.
영국에 돌아온 그는 일기에 이렇게 기록했다.
“나는 아메리카를 회개시키려 아메리카로 건너갔었다. 그러나 나를 회개시킬 자는 누구인가. 나는 외관상으로는 훌륭한 신자다. 위험이 없는 한 설교도 잘하고 믿음도 좋다. 그러나 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 라고 외칠 수 있는 신앙을 원한다.”
그는 그야말로 바닥을 드러냈습니다. “망연자실(茫然自失)” 그 자체였다.

이 시기에 그는 기존에 자신이 가지고 있던 “옥스퍼드 출신의 영국 교회 모범생 성직자라는 틀”을 깨는 행동을 하기 시작한다. 모라비아교도들과의 교제를 시작했고, 퀘이커교도들의 예배에 참석하기도 했다. 그는 그곳에서 처음으로 영국 교회의 꽉 짜여진 예배의식과 획일화된 기도문에서 벗어나 자유기도를 해보았다. 처음으로 ‘내 말로 기도’를 해 본 것이다. 그는 ‘형언할 수 없는 감격’이 마음에서 넘쳐났다고 고백했다.

이런 밑바닥을 깨고 나오려는 몸부림 끝에 드디어 “회심(回心)”의 그 날이 그에게 찾아온 것이다. 드디어 그의 인생에 ‘절정’이 찾아온 것이다. 1738년 5월 24일(수) 런던시(市) 올더스게이트가(街)의 성경연구와 기도를 목적으로 한 작은 집회에 참석했다. 한 낭독자가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읽고 있었다. 그때 웨슬리의 마음엔 동요가 일기 시작했다. 그는 그 마음속의 동요를 이렇게 일기에 적었다.

웨슬리 회심일 날의 일기 -  1738년 5월 24일(수)

그날 저녁에 나는 올더스게이트 가에 있는 기도모임에 별로 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으나 참석했다.
거기서 어떤 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강해 서문을 읽고 있었다. 밤 9시 15분 쯤, 그 낭독자가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변화를 가져오시는 일을 묘사하는 말을 듣는 중에 나는 내 마음이 이상스럽게 뜨거워짐을 느꼈다.

나는 내가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고 있음을 느꼈고 구원을 위해서 그리스도만을 의지한다고 느꼈다. 그리고 주께서 내 모든 죄를 없이 하였다는 확신이 생겼고 나 같은 자의 죄를 다 사하시고 죄와 죽음의 법에서 나를 구원해 주셨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이 지극히 개인적이고 내적인 경험이 존 웨슬리의 인생을 변화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때부터 엄격한 의식주의자였던 존 웨슬리는 “틀”을 깬 위대한 전도자가 되었다. 물론 변화에 따른 시련을 곧바로 다가왔다. 역시 인생은 드라마가 한 순간도 우여곡절이 없는 때가 없다. 그래서 그토록 사람은 변하기 힘들다.

이렇게 “회심(回心)”을 경험한 그가 며칠 뒤에 기록한 일기를 보면 또 다시 내적인 절망과 좌절, 한 숨이 가득담긴 고백을 쏟아낸다. 자신은 믿음이 없는 사람이라고 다시 좌절에 늪에 빠져가는 것이다. 그 때 그를 다시 일으키도록 심켜진 씨앗이 바로 이 말이다.

미국선교에서 철저한 실패를 맛보고 돌아온 직 후에 모라비안교의 목사 페터 뵐러와 대화 중에 “회심(回心)”의 기쁨을 체험하지 못했음을 깨달은 그는
“내가 전도를 중지하는 것이 옳지 않은가?”
라고 묻자 페터 뵐러는
“그런 말씀하지 마시오. 선생은 믿음을 얻을 때까지, 그 믿음을 얻은 후에는 그 믿은 믿음을 전하시오.”
라고 했었고 웨슬리는 “회심(回心)” 후에 다시 찾아온 낙심 속에서 이 말을 실행으로 옮겼다. 그리고 이제 진짜 그는 변화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변화에 대한 대가는 철저한 배척과 비판이 뒤따랐다. 마치 예수가 그랬듯이 그도 자신의 고향 영국 교회에서 철저히 욕을 먹고, 강단을 뺏기는 수모를 겪었다. 하지만 절망적인 결과가 오히려 새로운 세계와 역사를 열어주는 시작이었다. 이제부터 그는 새로운 역사의 개척자가 된 것이다.

강단을 빼앗긴 존 웨슬리는 “거리”로, “민중 속”으로 내려갔다.
당시 산업혁명의 시기를 겪으며 전 인구의 80%를 차지하던 “민중”, “노동자계급”은 그야말로 혼돈과 어둠, 부패와 범죄의 소굴이었다. 초기 자본주의의 무자비한 착취가 난무하고 노동자들의 생활은 그야말로 절대 빈곤이었는데 유아사망율이 최악의 상태였다는 것과 노동자의 평균 수명이 30세였다는 사실이다. 그 곳에서 옥스퍼드 교수 출신이자 점잖은 영국 교회의 화이트카라를 한 존 웨슬리는 “사자후”를 터트린 것이다. 그리고 “민중”이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웨슬리는 입으로만 “변화”를 말하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 “민중”의 삶을 “변화”시키려고 자신의 남은 인생을 마지막 순간까지 불태웠다. 웨슬리는 직접적으로 자기 자신의 런던의 교회에서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고아원과 진료소를 개설하고 학교를 만들었으며, 신용협동조합과 섬유 공장을 운영하였다.
게다가 노동자들을 위한 세금 감소와 그 유명한 윌버포스와 함께 노예제도 폐지를 위해 사회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간접적으로는 평신도들로 하여금 각자가 활동하는 사회의 여러 부분에서 양심운동, 인간화운동, 민주운동을 일으킴으로써 영국 사회 전체를 구원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의 이런 “변화”의 바람은 영국을 휘두르고는 지인들을 타고 미국으로 건너갔으며, 미국에서 소용돌이쳤던 바람은 다시 조선으로 흘러들어왔던 것이다. 결국 한 사람의 회심(回心)이 “나비효과”가 되어 우리에게까지 영향을 준 것이다.
이 놀라운 역사의 출발점이 바로 그의 “회심(回心)”의 날이었기 때문에 오늘 우리도 ‘존 웨슬리 회심 272주년 기념주일’을 지키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존 웨슬리의 이야기를 통해 이것을 기억하면 좋겠다.

첫째, “틀이 깨지는 고통”이 있은 후에 내 안에 찾아오는 작은 내적변화가 놀라운 역사의 “나비효과”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이는지가 관건이다.
웨슬리도 “회심(回心)”체험 후에 수차례 자신의 내적변화에 대해 의심하고 갈등하고 좌절하려던 순간이 있었다. 하지만, 페터 뵐러의 충고를 따라서 “믿음을 얻을 때까지, 그 믿음을 얻은 후에는 그 믿은 믿음을 전하는” 도전을 했고, 진짜 “변화”는 그 도전 후에 찾아왔다. 인터넷 백과사전을 검색 해봐도 회심(回心)은 전 과정이 하나님의 부르심이지만, 인간은 자유롭게 의지적으로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한다. 우리가 “변화”의 바람이 되기를 소망해본다.

둘째, “절망”을 맞이하는 태도이다. 절망과 어떻게 싸우느냐에 따라 “인생역전”, “대반전”의 드라마가 펼쳐질 수도 있고, 아니면 계속 “절망”일 수 있다. 웨슬리도 미국선교의 실패 후에 기존에 자신의 교만함과 완고함 때문에 거들떠도 보지 않던 타교단 사람들과의 교우 속에서 새로운 길을 찾았다. 자신의 예상치 못한 변화에 대해 자신의 동료들에게 배척을 받을 때 거리로, 민중 속으로 나갔고 그는 “개척자”가 되고, “역사”가 되었다.
풍파가 없는 인생이 없다고 한다. 그런데 바로 그 때가 전혀 다른 길로 눈을 돌릴 수 있는 순간이며, 그 때가 진짜 기회일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가 관건이다.

결국, 믿음이 생길 때까지 부딪쳐봤던 웨슬리가 “믿음의 영웅”이 된 것처럼, 우리도 오늘 새로운 도전을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 한다.


John Wesley의 연표
1703.6.28  아버지 사무엘과 어머니 수잔나 사이에서 19명중 15번째 아이로 아버지가 목회하는 Epworth에서 태어남.
1709.2.9    6세 화재에서 생존함을 어머니 수잔나가 "불에서 꺼낸 타다 남은 나무 토막(스3:2)"으로 비유
1714         10세 런던 챠트하우스 입학
1720         16세 장학생으로 옥스퍼드(Oxford) 대학 크라이스트 처지 대학에 입학
1724          21세 인문학 석사
1725.9.19   22세 deacon 안수를 받음으로 영국 성공회 목사가 됨(4대째 목사)
1726. 3.17  23세 옥스퍼드 대학 Lincoln College 조교수(fellow) 활동
1728. 9.22  25세 Elder 안수 받음.
1729          26세 Holy Club 참가함(회장직 역임)
1735 10.14  31세 미국 Georgia로 선교 출발 , 풍랑 가운데 중요한 신앙 체험
1736 2.5     32세 미국 조지아주 사바나항 도착
1737 12.2   33세 귀국길에 오름(선교실패)
1738 2.1     34세 고국 도착
1738 5.24    올더스케이트에서 회심체험
1739. 4.2    브리스톨에서 야외 설교 시작(감리교 부흥운동의 본격적인 시작)
1742          브리스톨에서 속회조직. 어머니 수잔나 웨슬리 임종
1746          웨슬리의 첫번째 설교집 출판
1751.2.18   네명의 자녀가 있는 미망인 메어리 바질과 결혼
1760년대   북아메리카에서 감리교 부흥운동이 시작. 평신도들이 독자적으로 신도회를 조직.
1771.6.13   평신도 여성 설교가 허락 – Mary Bosanquet.
1784.12      공식적인 미국 감리교회의 시작 (Methodist Episcopal Church)
1791. 3.2    88세 사망

John Wesley가 남긴 통계
전도생활 - 50년간 말을 타고 지구 10바퀴이상 되는 거리를 다님
선교거리 - 40만Km
하루평균 다닌 거리 - 32Km
저술 - 200권이 넘음
설교회수 - 4000번 이상 설교
60년간 변함없는 생활 - 새벽4시 기상 기도와 설교
찬송생활 - 동생 챨스 웨슬리와 함께 만든 찬송가중 525곡을 선정 찬송가 만듬
사망5일전 (88세) - 32Km떨어진 곳에 복음 전도
함께한 사역자 - 죠지 휫필드, 챨스 웨슬리 등

네이버 Naver 백과사전(두산백과사전)
회심 [回心, conversion] 일반적으로는 정신적 혁신 내지는 전회(轉回)를 뜻하고, 신학적으로는 반대의 길을 걷다가 신과 신의 법에 따르기로 마음을 바꾸는 일.

그리스도교에서는 사람이 평범한 생활 또는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어떤 계기에 마음을 돌려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전폭적으로 따르게 되는 것을 말한다. 회개와 같은 뜻으로도 사용한다. 불교에서는 발심(發心)이라는 말을 쓴다. 성서에서는 사람이 신의 부름에 응하여 신에게 귀일(歸一)하는 것을 말한다. 신약성서, 특히 《누가복음》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비의(非義)에 맞서고 그리스도에 대립하는 모든 언행에 등을 돌리는 것을 가리켜서 이 말이 자주 쓰인다.

신의 부름은 정신적 ·심리적으로 필요에 따라 개개인의 영혼에 직접 호소한다. 회심의 과정은 처음부터 끝까지 신이 부르고 사람이 이에 화답하는 것이지만, 인간의 응답이 전적으로 수동적인 것은 아니다. 인간은 자유롭게 의지적으로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다음 Daum 위키백과
회개(悔改)는 신에 대한 인간의 내적(內的) 변화를 나타내는 말로서, 죄에서 벗어나 신을 향하는 인간 심정의 근본적인 전환을 의미한다. 이러한 내적 변화가 생기기 위해서는 인간이 신을 배반하여 죄적 존재(罪的存在)가 된 데 대한 슬픔, 그리고 그 죄의 고백과 죄로부터 회복되려는 염원이 있어야 한다.

《성서》에 의하면 예수의 첫번째 선교는 "때가 왔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 회개하여 복음을 믿으라"고 하는 것이었듯이, 회개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기능에 대한 응답이기도 하다. 신의 작용 없이 인간은 자신이 죄적 존재임을 알 수도 없고, 그 죄에서 벗어나 신으로 향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 때문에 회개 자체가 신의 은혜로 되어 있다.

이처럼 회개는 신앙에 들어서는 최초의 행위라고도 할 수 있으며, 그리스도 교회는 이것이 인간을 구제하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신에 대한 응답으로 보고 항상 이 점을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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